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태복음 1:18-25)
1. 요셉의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
'수태고지'라는 주제는 흔히 누가복음에 나오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으로 고전적인 성화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마태복음에도 일종의 수태고지가 나오는데, 바로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님의 법적 아버지인 요셉에게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태복음 1:18-20)
성경에 따르면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다. 정혼한 여인인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했다고 하니 아마 걱정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로운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현몽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마리아의 수태고지만큼은 아니지만 요셉의 꿈도 많은 고전성화들이 남아 있는데, 편안히 잠을 청하는 모습이 아니라 번뇌에 빠진 모습이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얼마나 요셉에게도 큰 어려움이었을지 그리고 요셉 역시 얼마나 의로운 사람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참고로, 요셉은 신약성경에 아주 짧게 등장한다.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까지, 그리고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한참 동안 더 봉양했다는 전승이 있으니 아버지 요셉의 삶은 비교적 짧았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셉은 꿈을 통해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마태복음 1장에 현몽해서 알려주시는 주님은 이후 마태복음 2장에 세 번 더 현몽하시면서 아기 예수님을 보호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했던 요셉을 인도하고 지켜주신다.
2. 예수,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성경에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같은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하나님의 이름인 히브리어 'יהוה'라는 단어의 진짜 발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יהוה'라는 단어가 나오면 읽지 않고 넘어가거나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라고 언급하고 지나간 탓에 지금까지 그 발음을 '여호와'로 할 것이냐 아니면 '야훼'로 할 것이냐로 의견이 분분하다. 심지어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יהוה'라는 글자를 보면 손을 다시 씻고 와서 책을 넘겼다고 하니 얼마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호렙산에서 불이 붙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도 애굽으로 돌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명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애굽기 3:13-14)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내리실 때도 하나님은 제4계명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하셨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20:7)
몰라서도 못 부르고, 알고 있어도 부를 수 없는 너무나 높으신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그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바로 예수다.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 예수님의 사명, 사역,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죄'란 무엇인가?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혹은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전통으로 교회에 나오고 있는 사람들에게 '죄'란 매우 거북스럽게 느껴지는 것일 수 있다. 이렇다 할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인데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죄인이라 명명한다는 것이 불쾌하기 짝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원죄는 내가 지은 자범죄와는 다르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에게 자동적으로 부과된 원죄를 말한다.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하나님과 단절되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한복음 16:8-9)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나를 죄에서 구원' 해주시는 예수님을 모른다면 우리는 이 인류의 죄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류에게 주어진 '예수'라는 이름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이름인지 알 수 있다.
3.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태복음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표현한다고 했는데, 마태복음에서 첫 번째 구약 성경이 인용된 곳이 바로 이 구절이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2-23)
위의 언급된 선지자는 이사야로 그의 예언은 이사야서 7장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야훼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0-14)
선지자 이사야는 유다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했다고 나와있다.(이사야 1:1) 아하스는 악한 왕으로 구분되는데 선한 왕으로 구분되는 히스기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특히 아하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매우 본격적으로 실행했던 왕이다. 산당들에서 분향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녀를 불로 통과하게 하는 몰렉 신을 숭배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때에 아람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아하스를 포위했으나 능히 이길 수가 없었는데, 이런 악한 왕에게도 하나님은 이사야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구원을 베풀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아하스는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라고 하며 오히려 앗수르 왕에게 예물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한다.
바로 이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오늘 마태복음에 언급된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하나님은 이미 아하스가 하나님을 버린 왕이란 것을 알고 계시지만, 적군들에 포위되었어도 하나님을 믿는 것을 거절하고 앗수르를 택한 아하스에게 분노에 차서 하신 말씀이다.
우리 역시 믿는다고 하면서 또는 교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간섭하시는 것을 극구 거절하고 있을 때가 많이 있다. 믿음이 없는 아하스에게 심지어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징조를 구하라'라고 하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가까이 계심을 알게 하고 싶으셨으나 아하스는 대차게 거절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있을 수도 없을 것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인 것. 그리고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 그 이름 하나만으로 충분하고 완벽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태복음, 아니 이사야의 시대부터 예언을 통해 지속적으로 하신 말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의 목적은 무엇일까?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우리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던 우리를 다시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하심이 아닐까?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 죄로부터의 구원을 주실뿐 아니라 이제 예수님을 통해 임마누엘,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변화가 우리 삶에 물밀듯 들어왔다는 사실이 진정한 구원의 완성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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