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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am Deo

[아침묵상] 나를 찾아 주시는 하나님

by 위즈덤바이어 2023.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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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출장 차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를 방문한 적이 있다. 산티아고와 가까운 바닷가도 가보았는데 내가 사는 북반구 대한민국의 동해에서 바라보는 태평양과는 정반대에 있는 남반구 칠레의 차가운 태평양을 마주하니 대자연의 장엄함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내게 떠오른 말씀이 있었다. 지금도 극심한 고난과 어려움, 그리고 외로움이 다가올 때, 이 말씀과 그때 마주했던 칠레에서의 태평양 바다가 떠올라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와 뜨거운 사랑을 느끼며 안심이 된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7-10)

By Pexels 출처:Pixabay

이처럼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은 나를 찾아 주시는 주님이다. 나를 먼저 찾아오시는 주님, 지금도 나를 찾으시는 주님, 그리고 나를 통해 다른 이들도 찾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시다. 

 

1.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

절망에 처했을 때, 나도 모르게 장탄식이 터져 나온다. "하나님, 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제 문제를, 제 고통을 알고는 계십니까? 왜 이렇게 방치하십니까?"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정말 내가 믿는 하나님은 계시는 것인가, 계신다 해도 나라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셨던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건가?라는 의문이 걷잡을 수 없이 생겨난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27-31)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다'라고 생각되는 순간이 찾아올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나를 잊으시는 법이 없고 항상 먼저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아니 이미 내 옆에 계신다.

 

죄를 범한 죄인에게도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신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벌거벗었음을 알고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9)

 

자신의 동생인 아벨을 죽이며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된 가인에게 역시 하나님은 찾아가셨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세기 4:9)

 

아담은, 가인은, 주님이 찾아오신 이유를 알아야 했다. 그것은 그들의 죄를 묻고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자 함이었다는 것을.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 : 6-7)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신 것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16)

 

내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1서 4:9-10)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 사랑을 믿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17)

 

2. 찾는 자를 만나 주시는 주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되는 최고의 형벌을 받았다. 눈에 바로 보이지 않았던 이 영적인 죽음은 결과적으로 육적인 죽음과 환경적인 죽음을 초래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17-19)

 

하지만 하나님은 늘 가까이 계셨다. 먼저는 모세를 통해 율법으로,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주셨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는 성령을 보내셔서 함께 해주셨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사도행전 17:24-27)

 

 

생각보다 주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 하지만 인격적이신 주님은 우리가 마음 문을 열어 주님을 우리 안으로 초청하기를 원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문 밖에서 두드리시는 예수님. 출처: 네이버 블로그

 

부활 후, 40일을 이 땅에 계시면서 부활의 몸으로 많은 제자들을 찾아다니시며 '보이신' 예수님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3-8)

 

예수님은 부활하자마자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을 만나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갈릴리 호수로 돌아갔던 베드로를 만나주셨다(요한복음 21:1-23). 열 두 제자에 속하지 않았으나 제자로 함께 했던 사람들 중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으로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돌아가던 제자 두 명에게도 찾아가셔서 말씀으로 그들을 깨우쳐 주셨고 그들의 영의 눈이 떠져 예수님을 알아보실 때까지 함께 해주셨다(누가복음 24:13-32).

 

마치 어린 자녀와 함께 숨바꼭질을 하는 아빠처럼 너무 쉽게 발견될 수 있는 곳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주님을 발견하기를 옆에서 기다리신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찾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사명을 주신다. 

 

3. 충만한 사랑 가운데 발견하는 사명

이 같은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할 때, 나도 모르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주님께 헌신하고자 할 때, 들리는 주님의 소리가 있다. 선지자 이사야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했을 때, 자신의 주홍같이 붉은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지는 은혜를 입었을 때,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 6:8)

 

이사야는 이 음성에 응답했다. 자기 혼자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에 응답해 주님께 기꺼이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13-15)

 

지금은 은혜의 시대다. 심판의 시대가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다. 추수할 것이 너무 많지만 추수할 일꾼이 부족한 시대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 :37-38)

우리는 사랑받고 있다. 그것도 넘치게 사랑받고 있다. 홀로 있다고 느낄 때, 주님마저 나를 외면하고 있다고 느낄 때, 나는 버림받았다는 장탄식이 흘러나올 때조차, "예수님..."이라고 읊조리면 이미 내 곁에 계신 주님은 나를 만나 주신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시편 16:8-9)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고 한다. 내가 받는 사랑이 너무 커서 그 기쁜 사랑을 전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닐까? 오늘 누군가를 만난다면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건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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